
세종실녹지리에 따르면 조선시대 전국 8도의 도자기 가마 총 324곳 중 경상도에 가장 많은 71곳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이 가운데 김해지역에서 최근 조선백자가마 등 조선시대 도자기 가마 11곳이 발견되고 있는데 이는 실록에 나오는 김해의 감물야촌, 즉 대규모 요업단지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도자기 전쟁이라 불리는 임진왜란 기간, 수많은 조선의 도자기 기술자 사기장이 일본에 데려가 사쓰마, 아리타, 당진, 보살 등에서 고안된 생활을 시작한다. 세월이 흘러 일본 사회에 스며든 조선 도공들이 서서히 열과 성을 만들고 접시, 환대, 병 등의 도자기와 찻잔을 만들듯이 일본의 도자기 역사는 시작되었다.
18세기에 들어 아리타에서 만든 도자기는 유럽에서 인기가 높아진다. 아리타산 도자기는 당시 반도체에 비유될 정도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특히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 작센 지방 선제 후 아우구스트 1세(Frederick Augustus 1, 재위 33)는 동양의 도기에 병적일 정도의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아리타 도기의 3대 양식 중 하나인 감에몬 스타일의 채색 자기를 좋아했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통해 3만점 이상을 들여 유럽에 뿌렸다. 화려한 색채와 문양의 아리타 도기는 유럽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는 수입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을 만드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마침내 오랜 연구와 노력으로 고온 제조 공정 발견에 성공해 1710년 드레스덴 부근의 소도시 마이센 공장에서 자기 생산을 시작해 유럽의 고급도자 마이슨(Meissen)의 태동을 알린다.
부산구 포시장에 들렀다면 돼지 쿠파로 안을 채우고
초입의 죽도 왜성 안내판. 김해죽도 왜성이라는 명칭이 행정구역이 부산으로 바뀌어 죽림동 죽도왜성이 된 것 같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적의 안내판이 그러나 단단한 구조물의 설명으로 끝나는 것보다 관련 역사적 사실도 조금 불연해 주면 좋을 것 같다.
임진왜란 초기 파죽지세를 구가하고 있던 일본군은 이름의 참전과 이순신의 반격으로 전황이 서서히 불리해지면 한반도 동남해안 해안으로 물러나 장기 농성을 위한 성을 쌓기 시작한다. 특히 김해, 규포, 양산 등의 왜성은 조선수군에 의해 서해안이 봉쇄된 왜군이 낙동강 수로를 통해 서북 내륙에 접근하기 위한 교두보 확보 때문이었다. 부산신항 매립전의 1987년 지도.
경사로를 잠시 올랐지만, 이미 사방이 툭톤의 경관을 잡을 수 있다. 소낙동강 줄기가 점점 퍼진다. 강 오른쪽 아래에는 죽도 왜성의 선착장이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멀리서 찍은 같은 방향의 오봉산 전체의 모습. 평평한 산 꼭대기에 넓게 둘러싸인 죽도 왜성 성벽이 보인다. 죽도 왜성은 난카이에서 니시 낙동강을 따라 김해에 접근하는 길에 위치했지만, 동서에 길게 늘어선 형태였다.
이 각도는 오봉 산의 남쪽 경사면을 나타냅니다.
또 길을 잡고 왜성이 앉은 오봉산 능선으로 진행한다. 사원 옆의 길을 따라갑니다.
자료 내용처럼 능선은 개인묘지가 점령한 듯한 모습.
죽도 왜성이라는 이름답게 오모리도 나타난다.
오모리를 통해 조금 더 걸으면 열린 개활지가 나타나 멀리 김해 평야가 펼쳐진다. 이곳은 아마 니노마루, 삼노마루와 같은 죽도 왜성의 교외 부분이다. 끌려온 조선도공들이 모여 있던 공간이다.
개활지의 머리에서 김해시가 쪽을 바라보면 100년 전부터 논에 공장이나 집이 들어간 것 이외는 같은 모습이다. 산 줄기의 윤곽도 광대한 평야도 그대로. 주위가 마치 평지였다고 당시 산 정상에 앉은 왜성 존재감은 대단했던 것 같다.
죽도 왜성은 나베시마 나오모, 18이 낙동강 수로 확보와 내습에 대비해 만들었다. 인물이다. 우리로서는 유감스럽지만, 아들과 함께 조선인의 도자기술을 갖기 시작한 아리타 도기가 후일(18세기) 세계적 명품 도기에 올라가게 되는 그 초석을 둔 인물이다. 한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절대신임을 받아 히데요시의 규슈평정(1587) 직후 처음으로 장군직임지가 된 나가사키의 총책임자(대관)로 임명되기도 했다. 비골대가 느껴지는 외모다.
그런데 임진왜란 당시 일본은 왜 그렇게 조선도공을 잡기 위해 혈안이었을까? 이유는 당시 일본 사회의 상황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6세기 일본은 사회 전반에 다도문화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흔히 진중에서 무장들과 여러 차례를 즐기며 천리휴라는 다도사장까지 두었다. 카토 기요마사 등 많은 다이묘들도 그의 물었다. 자연스럽게 다기는 수요가 높고 부러워하는 고가 수입품이었다. 그러나 일본에는 다기를 만드는 기술이 없었다. 당시 1200도 이상으로 굽는 기술을 가진 것은 세계에서 중국과 조선뿐이었다. 선진국 조선에 상륙한 왜군들의 눈에는 조선의 모든 물산이 진행되었다. 일본은 명주, 모시, 종이, 필묵 등 모두가 귀중하게 가져가면 돈이 되지 않는 일이 없었다. 조선에서는 지천명의 광목도 그들에게는 쉽게 접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기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당시 일본 서민은 토기나 목기에 밥과 나라를 담아 먹고 제프에서도 칠기를 쓰면 괜찮았다.
조선도공들이 일본에 끌려간 시기는 크게 1595년과 1598년 두 시기로 보인다. 하지만 전반적인 흐름으로 보면 조명연합군에 몰려들어 당황해 조선을 빠져나가야 했던 정유재라는 마지막 무렵보다 강화협상 결과로 철수하게 되는 1595년에 더욱 집중된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3년 가까이 낯선 환경에서 죽음을 겪고 있던 일본군이 강화조약의 성립으로 전쟁이 끝나 평화가 도래한 듯한 기분에 젖어 그동안 빼앗은 물건과 조선인을 미리 본국에 태우는데 마음이 달콤하고 서두르기 때문이다.
직중은 임진왜란 7년간 한 번도 귀국하지 않았지만 정유재와는 끝날 무렵 다른 장수보다 일찍 조선을 떠난 것 같다. 그가 받은 히데요시의 특명을 위해서도 안전한 귀국시기를 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 백파선에 그 주제가 나온다. “…김해의 리듬에만 수백척의 배가 떠오르고 있었다. 다른 일본군에도 모르고 히데요시에도 보고하지 않은 철군이었다. …”라는 간접 표현을 통해 죽도 왜성임을 말한다.
다양한 상황에서 보면 김해도공 출항지는 죽도 왜성선착장일 가능성이 높다. 죽도 왜성이 난카이에도 가깝지만 본성이기 때문에 포로 관리 측면에서도 그렇다. 조선인 포로의 대부분이 죽도 왜성에 집결했을 것이다. 사진은 죽도 왜성의 선착장이 있던 곳에서 추측되는 해안.
선착장 해안에 봄의 전령사 광대가 피어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밟아 다니는 꽃이지만, 근처에서 보면 이렇게 귀중한 모습이다. 마치 여기에서 떠난 조선천민도공들처럼.
지금 백파선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김해상 동면대강마을로 향한다. ‘규포시장 종점’ 정류장에서 김해 70번 버스를 타고 갔다. 아리타산 도자기의 역사를 쓰기 시작한 이삼평과 백탄선은 시기를 달리 일본으로 건너갔다. 두 사람의 고향은 김해로 추정된다. 백파선은 일본에 끌려간 종삐라는 도공의 아내이지만, 그녀는 규슈 사가현의 다케오 지역에서 남편이 1618년에 병으로 죽자 자신이 직접 도공을 이끌고 가마를 아리타로 옮겨 조선 백자 생산에 힘을 쏟았다는 것이다.
40분 가까이 달려 도착한 대강 마을 중앙에는 카페 백파선과 백파선 광장이 백파선의 이름을 붙여 있었지만, 모든 동네가 백파선 홍보에 열중하는 모습으로 비쳤다.
만약 백파선이 여기 출신이라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당시 당겨진 곳은 어딘가라는 생각에서 마을 옆의 대포강에 나간다.
낙동강 지류인 대포천은 제법강폭이 있었다. 지금은 수량이 적고 수운으로 불가능해 보이지만, 여름이라면 배를 띄워 사람을 태울 정도로는 될 것 같다.
큰 감리의 남쪽 풍경. 최근 조선백자 등 다양한 가마가 저신어산(631m) 줄기에서 발견돼 백파선의 존재 가능성을 더욱 진하게 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 조선여도 공백파선의 존재에 관한 내용 중 실제 사료로 증명된 것은 단 2가지 형태다. 즉, 시라나미선 부부를 데린 일본 규슈의 고토가 공적을 기록한 고토가 오야 공기. 1705년)의 비문 등 2개다. 만료묘지 도파는 그녀의 계명.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조선도공 백파선의 임진왜란 당시의 궤적을 쫓아보면 대략 같은 내용이다.
"이제 대강마을에서 김해 70번 버스로 규포로 돌아와 규포 왜성으로 향한다"
구포왜성터에 앉은 부산북구 문화예술회관과 부산빙상센터에서 구포왜성 혼마루 방향으로는 운교로 연결되어 있었다. 다리 위에서 잡히는 이 경관은, 과거 왜군들이 주변을 정찰하고 있던 그 시점으로부터.
상계봉에서 뻗어온 요시죠산 정상에 위치한 구포왜성은 죽도 왜성보다 배 가까이 높은 해발 76m 위치에서 조금 발품을 팔아야 했다. 비교적 일본성의 원형을 보여주는 부분도 있다.
110년 전 이 구포세성의 사진을 보면 바로 상전벽해라는 말이 실감된다. 상계봉의 큰 줄기와 구포왜성이 이 각도로 포착된 것을 보면, 사진은 지금의 도쿠가와 초등학교나 구포 일동 행정복지센터 정도의 위치에서 찍은 것이다. 전 로봇대와 논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높은 곳에 앉은 왜성의 존재감이 부각된다. 규포 시장도 왼쪽 곳곳일 것이다.
지금 구포왜성을 빠져나와 금색의 석양 다리라는 고가교로 구포왜성을 재검토한다. 그러나 고층 빌딩으로 둘러싸인 왜성은 존재감이 거의 없다. 우리 국력이 이미 그랬다. 15 김혜상동 면대감리 죽도 왜성, 규포 왜성 참고 자료: ♧400년 전 도기 전쟁 이미스크 ♧유럽 도자기 여행(동유럽편) 조영준 ♧소설 7년 전쟁 김성한 ♧소설 백파선 이수광 ♧조선여성도공 백파선(논문) 노성환 ♧[‘조선여도공’ 백파선의 궤적】 ②재정의 내리는 백파선 ::경남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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