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미타 부처가 서방 정토의 부처이지만, 약사 부처는 동방 정토의 부처입니다. 따라서 약사전은 동쪽을 바라보고 세우게 되지만, 통상 극악전과 마주한다. 약사여래는 과거세에 약왕이라는 이름의 보살로 수행하고, 모든 생애통과 슬픔을 소멸시킨다는 12대원을 세워 이를 수행해 이런 공덕으로 부처가 되었다. 즉, 약사 여래는, 중생의 모든 병을 치료해 줘, 복수의 통증을 없애는 동방 유리광 정토 세계의 불상이다(아미타 불은 보광명전, 약사불은 보광전). 지성광 불교적 관점에서 전세계 우주를 불국토라고 한다. 이러한 우주를 항하 모래의 알과 같이 많은 세계로 삼아 "3천대천세계"라고 표현한다. 우주의 수많은 별을 불국토로 생각하고 밤하늘의 무한한 광명을 비추어주는 북극성을 한민족은 칠성님, 불교에서는 치성광 여래로 했다. 삼신각에 모시는, 7분, 7색의 증명을 거친, 주불인, 칠성님(치성광여래/신님)은, 무병 장수와 자손 번영을 상징하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약사 불과 같이, 좌우에 붉은 해를 가진, 닛코 보살(오른쪽 보좌) “3위, 4위, 칠성을 상징하는 7분여가 증명하고 호위하는 십존불 형태의 후불탄화를 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특이하게 서산개심사는 치성광여래를 대웅전에 모시고 있다. 알려진 영원한 약사 케어기도 장소 ①창녕관 용사 한국 최초의 약사의 기도처. 창건 때 용이 구름을 타고 올라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관룡사라고 명명했다. 임진왜란 때, 모든 건물이 불타고 있었지만, 약사전만의 불화를 면해, 기묘하게 생각된 스님이 빔을 확인한 결과, 영화 5년 기유(349년)라는 문장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분노를 면한 소문으로 관룡사에서 빌리면 하나의 소원은 반드시 들어준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②경산불굴사약사 보존 불굴사의 약사기도영험과 함께 이곳 홍주암은 영험한 나 반존자(독성)기도소이기도 하다. 원효대사 첫 수행굴인 원효클과 함께 김유신이 삼국통일을 기도하고 비법을 얻었다는 전설이 있다(이름이 비슷하다, 경주의 뼈 파는 12개의 석굴로 구성된 석굴사원이지만 선무도가 유명하다.
*장성 내장산(백암산) 백양사 유명한 가을 단풍 관광지인 백양사는 631년(백제무왕 32년), 스님 여환이 백암사로 창건했다. 그 후 스님 나카후치가 1034년(고려덕종 3년)에 중창을 하고 정토사라고 했지만 1574년(선조 7년)에 환양 선사가 백양사로 바뀌었다고 한다. 사원 이름을 바꾼 연유에 대해 몇 가지 전설이 있다. ① 환양 선사가 영천굴(백양사에서 30분 정도 거리의 절벽에 있는 약수가 나오는 천연굴). 현재는 영천굴 앞에 약사암을 세우고, 영천굴 위의 절벽에 전각을 세우고, 관음 보살을 모시고 있다. 영천굴의 약수는 영험이라고 한다)에서 금강경을 읽고 설법을 했다고 한다. 3일째가 되는 날, 백양이 나타나서 설법을 듣고, 눈물을 흘려, 7일째가 되는 날, 꿈을 꾸었지만, 백양이 나타나, 자신은 원래 하늘의 “천인”이었지만, 죄를 저지르고 짐승이 되어, 선사의 설법을 듣고, 다시 “천인”으로 환생하게 되었다고 하는 꿈이었다. 환양 선사가 이튿날 아침 일찍 영천동 앞에 가보면 백양 한마리가 죽어서 절의 이름을 ‘백양사’로 바꿨다고 한다(약사암 전각에는 이런 내용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②「마루요 선사」가 백양사 대웅전에 체재하면서 경을 설법하고 불꽃을 하자 백양들이 내려 듣는 등 백양들이 모여 오는 경우가 많아 절의 이름을 「정토사」에서 「백양사」로 개칭한 등의 전설이 있다. 백양사의 보물로는 극악보전 아미타 여래좌상(보물 2066호)이 있어, 최근 명부전 「지장보살좌상」의 복장유물로 「조성필 공기기」라고 하는 「발원문」이 최근 발견되었지만, 이 불상이 1653년에 조성된 상이 전남류형 문화재로 대웅전(43호), 사천왕문(44호)이 있다. 백양사 경내의 8층탑은 8위를 상징하며 석가여래의 진신사리 3과를 안치하고 있다. 백양사 이팝 나무고려 공민왕 때 영광 ‘화갑사’를 중창한 각진국사가 쌍계루를 건축하면서 사용한 지팡이를 쌍계 앞, 연못 집에 꽂아 두었지만, 그 지팡이로 잎이 서서 꽃이 피는 현재의 ‘이팝 나무’가 되었다는 전설 인근 백양사 천진암은 사찰식품의 대가인 정광수님이 주석하는 비구니도량이라고 한다.
비와자나블과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는, 상측의 「가미다이오전」에는 「철조약사 여래좌상」(국보 58호), 「미륵쾌불탄」(국보 300호)의 국보 2점과, 「철조 비와자불상 좌석 조대좌」(보물) 상대웅전의 마루는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연꽃 모양의 흙벽돌(전석)이 깔려 있다.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는, 아래의 「시모다이오전」에는, 보물 337호로, 일, 국보로 지정된, 「금동 약사 여래좌상」의 국보 1점 따라서 하세지에는 총 국보 3점, 보물 3점을 보유하고 있다. 영험의 약사기도처인 하세지가 있는 청양에서 북쪽의 예산으로 가는 도중에는 예당호 뛰어오르는 다리와 모노레일이 있는 예당저수지(예당관광지)가 있다. 예산에는 수덕사가 있다. *서울 북한산흥국사 약사전을 주불로 모시는 흥국사는 신라분무왕 원년(661년)에 원효대사가 도봉산 아게츠지 부근의 「원효사」에서 수행하고 있었는데 도봉산을 넘어 북한산 서쪽에서 상서의 기운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 서기를 쫓아다녔다. 거기에 사찰을 창건해, 향후 많은 어른이 배출된다는 의미로, 흥성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하는[하라 고성사는, 도봉산 망월사 부근, “하라 타카시”로부터 수도이며, 여기 “하라 타카시”에는 하라타카 대사의 동상이 있다(모험한 나하 기도. 그 후, 1770년 영조임금은 생모인 숙빈 최씨의 무덤이 있는 인근 소령원(경기도 파주에 있는데 인근 파주 보광사에는 숙빈 최씨의 오실각이 있다)에게 물린 뒤, 눈물을 되돌아가고 있어 판을 하사시켜 주전불인 약사불이 나라를 흥미롭게 한다는 의미에서 흥성암의 이름을 흥국사로 바꿨다.
게다가 궁전의 상궁들이 번갈아 머물며 선학을 공부하게 하고 왕실기도처로 했다고 한다. 현재 설법전에서 사용하고 있는 미타전 안의 뒷면 구극악도는 김홍도의 작품이라는 설이 있다. 약사의 기도 양인 흥국사는 북한산 맞은편의 노코산(한미산)의 기슭에 있으며 북한산의 전망이 뛰어나다. *파주 보광사 국가비보사찰에서 894년 도선국사가 어명을 받아 창건하여 고령사로 했다. 그 후 1388년 무학대사가 중창했다. 임진왜란 이후 1622년에 주창한 보광사는 1740년(영조 16년) 영조가 인근에 살고 있는 숙빈 최씨의 무덤 소령원을 조성하고 원정이 되어 보광사로 개칭했다. 대웅보전 옆에 숙빈 최씨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오실각이 있다(최씨는 인현왕후의 무수리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매일 폐서인이 된 인현왕후의 복위를 기도하면서 숙종의 성은을 입고, 숙종의 성은을 입고 옆에는 영조가 심어졌다는 수령 300년의 향기가 있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 세자에 대한 효성을 기리는 수원 용주사와 함께 보광사는 영조가 효를 실행한 사찰로 효의 본견도량이 되었다. 호광지의 대웅보전의 현판은 영조대왕의 친필이다. 대웅보전의 용두 공포장식도 볼거리이며, 대웅보전천장에는 동양화기법으로 그려진 드문 꽃조화와 초충도가 그려져 있다. 또 대웅보전의 벽화에는 극악행을 타고 가는 반야 용선, 미즈키 관음과 동료, 연꽃 위의 보살, 키와 사자, 백호가 그려져 있고 사원 미술관을 보는 것 같다. 대웅보전 맞은편 맨셀에는 드문 수작품인 모의가 걸려 있다. 경기도형 문화재로는 대웅보전(제83호), 동종(158호), 목조보살입상(248호), 영산회상도(319호), 지장시왕도(320호), 현왕도(321호)가 있다. 이 중 158호 동종은 월 국가 보물로 승격되었다(문화재청은 부터 모든 국보와 보물에 번호를 부여하지 않는다고 한다)
372년(소수림왕 2년) 중국 5호 16국 중 하나인 전진의 왕 부견이 승려 순도와 사신을 통해 고구려 처음으로 불교를 전했지만, 그로부터 2년 후인 374년(소수림왕 4년)에 진국에서 승려 에도. 그 7년 후인 381년에 동진의 승려 애도상이 신라에게 불교를 전해가는 도중에 강화도에 들리게 되어 전등사의 전신인 진종사를 세웠다고 한다. 진종사는 900년 가까이 지난 뒤 1266년 중창되어 1282년(고려충열왕 8년)에 충열왕이 굵은 자였던 시대에 혼인을 한 정화공주가 대장경과 옥을 보인 것을 계기로 전등사 고려정화공주 17년 동안 태자비로 살고 왕비가 되기를 기다렸지만 원국 제국대장희(하라조히메)에 밀려 드디어 충열왕의 왕비가 될 수 없었던 공운 공주다. 제국대장희(원성공주)는 원국세조 ‘쿠빌라이’의 딸이다. 쿠빌라이는 징기스칸의 손자로 동부 유럽에 이르는 대몽골 제국을 건설한 황제. 충열왕이 원래 나라의 어머니에 있을 때 혼인동맹을 위해 제국대장희와 결혼하고 결혼 후 귀국하여 충선왕을 낳았다. 정화희는 고려충열왕의 정실이지만 원국 제국대장희에 밀려 두 번째 비로 떨어졌다. 아들을 낳았지만 왕위는 제국대장희가 낳은 원국황실의 손자인 충선왕으로 돌아왔다. 세월이 흐른 후, 정화 공주의 손자가 공양왕으로 올라간다. 그 후, 전등사는 1614년(광해군 6년)에 화재로 전소됐지만, 1621년(광해군 13년)에 새롭게 완공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지어진, 보물 178호인, 전등사 대웅 보전에는 드문 것이 있다. 대웅전 네 구석의 처마 아래에 있는 손바닥과 머리로 지붕을 지지하고 있는 나하 조각상이다. 알려진 내용에 따르면 중창불사 대웅전 건축공사를 맡은 도편수는 시모무라 주막의 주모와 눈이 맞았고, 두 사람은 공사가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와 함께 사는 것을 약속했다. 도편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건네주었다. 그런데 공사가 끝나기 직전 주모는 그림 수가 맡긴 돈을 전부 꺼내 도망쳐 버렸다고 한다.
이에 몹시 화난 길편수는 도망친 주모가 양손바닥과 전신으로 무거운 지붕을 지지하는 고통과 함께 벌거벗은 모습의 수치를 견디며 법당에서 들려오는 부처님의 말을 듣고 참회한다는 의미에서 "라고 한다. 한층 더 해적적인 것은, 네 모퉁이 중, 2개의 모퉁이의 「나산」은, 한손만으로, 지붕을 지지하고 있어, 마치 주모가 벌을 받으면서도, 밑단을 부딪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선조의 위트와 친숙함을 느끼게 하고 있다. 전등사에는 대웅전(보178호), 약사전(보179호), 철종(宝393호), 대웅전 목조석가 여래좌상(보1785호), 목조지장 보살삼존상 및 시왕상(宝17宝珠宝珠警). 전등사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 2개(수령 700년, 350년), 가야키 2개(수령 각 400년), 청초의 나무 1개(수령 280년)가 있다. 전등사 은행나무는 주지스님이 과도한 은행나무의 과실 제물을 추구하는 관청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동안 실수로 나타난 추첨 스님과 동승, 그리고 노스님이 열매를 많이 열게 하는 3일기도를 올리게 되었다. 그런데, 삼승의 마지막 날 축문은, 전등사의 은행나무가, 천년만년 더 이상 열매가 맺지 않게 해 주었으면 하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축문이 끝나자 뇌뢰와 함께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머리를 숙인 사이에 추송 승려, 동승, 노스님이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이후 은행나무에는 더 이상 열매가 묶여 있지 않다는 설화가 있다. 400년의 「가야키」 2개는, 대웅보전정원 앞, 대웅전을 오르는 길에 1615년 전등사를 중창하면서, 「풍치목」에 심었다고 말해져, 280년이 된 「청초의 나무」는, 대조동(대웅보전에 가는 입구에 있다)에. 전등사 철종(보물 393호)은,
전등사 경내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고 있던 「정족산사고」가 있었지만, 현재의 「정족산사고」건물은 1931년 이후, 없어진 것을 1998년에 복원했다(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고 있던, 정족산사고, 태백산사고, 오대산 사고에 대해서). *대구동화 나가가와 긴카이지와 함께, 야공산 대표 사찰인 동화사는,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기 전의, 493년(소지왕 15년)에, 「고쿠츠키」 스님이 「유가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지만, 흥덕왕의 세번째 아들인, 「심지왕모래」 스님, 73 (신라불교는 을지왕 시대 육로를 통해 고구려 스님인 묵호자와 고구려에서 온 동진의 스님 애도상이 불교를 전파했으나 공인을 받지 못했다. 그 후 2차 돈. 대구 시민이 팔공산의 신암과 함께 가장 많이 기도한다는 동화사의 통일약제사 대불은 1992년에 세워진 높이 33m의 돌로 만들어진 세계 최대의 석불이다. 동화사는 국민 관광지로 지정. 보물은 대웅전(보물 1563호), 1주문 전마애 여래좌상(보물 243호), 가로암(비와전) 석조비 로자나 불좌상(보물 244호), 비와암(烏路殿) 삼층석탑(보물 247호), 보물 247호 상도(보물 1610호), 목조 약사 여래 좌상복장 전적(보물 1607호) 등이 있다. *대구파게사 파계란 9개에 흩어진 수류를 모은다는 의미라고 합니다(하계사의 좌우에는 구계곡의 물의 흐름을 한 곳에 모은 수심 12미터의 저수지가 있다). 804년(통일신라애장왕 5년)에 심지가 창건되어 임진왜란으로 사라졌고, 1605년(선조 38년)에 계통이 중창하고 1695년(숙종 21년)에 현응이 삼창했다. 파계사는 관음 보살을 주화로 모시는 원통전이 주 전각이다. 파계사 주지 「현응」은, 숭유억 불정책으로 노역을 부담하기 위해 승려들이 수행할 수 없었지만 이를 탄원하려 한양에 갔지만 남대문 부근에서 3년간 잡일을 하면서 내관 통지를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을 만날 수 없었다.
포기하고 떠나려는 날 숙종이 “남대문에서 용이 승천하는 꿈을 꿨다”며 내관을 시켜 임금을 만나게 됐다. 현준은 불교를 탄압하면 큰 인물이 태어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현은은 백일기도를 하면서 친척이 두꺼운 삼각산의 농산 스님에게 숙종 아들로 태어나 전생할 것을 권했다. 농산이 무수리 출신 후궁 숙빈 최씨에게 현명해졌고, 그 후 태어난 아들이 후일의 영조였다고 한다. 숙종은 이에 대한 보상으로 계계사 주변 40리의 토지를 하사하려 했지만 현은은 이를 맹세하고 유생들의 행패를 막기 위해 사원에서 선조임금들의 위패를 모시도록 요구해 조선왕조의 원찰이 됐다. 숙종은 파계사에 기영각을 세우고 선왕들의 위패를 모시고 하마를 세웠다. 이후 유생은 파계사를 함부로 만지지 못했다. ( 원통전의 목조 관음 보살자리상을 개금 불사로 했을 때 영조임금 직접 착용한 도포가 나와 이것이 사실임이 밝혀졌다. 모시던 위패는 1910년 국권강탈로 서울로 옮겨졌다). 문화재로는 원통정(보물 1850호), 하계사 영산 회상도(보물 1214호), 하계사 건칠관음 보살좌상 및 복장 유물(보물 992호)이 있으며, 설선당(강습소), 적묵당(사상의) 했다. 파계사 부속암자인 성전암은 경북 3대 기도도량 중 하나이다. *나가가와 긴카이지 대구동화사와 함께 팔공산 대표사찰인 은해사는 809년(신라헌덕왕 1년)에 혜철국사가 창건한 해안사였다. 그 후 1270년 홍진 국사가 중창했다. 1545년에 소실해, 1546년 지금의 자리에 옮겨, 인종의 태실을 봉해, 극락 정토의 은색의 바다를 의미하는, 「긴카이지」로 했다. 1847년(헌종 13년)에 화재로 1천여관의 모든 전각이 소실되어 중건했다. 은해사에는 성보박물관과 승가대학원이 설치되어 있어 불교교육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보유 문화재로는, 「은해지 쾌불탄」(보물 1270호), 「은해지 청동 북 및 북 매달기」(보물 1604호), 극락왕 생장면을 그린, 소금 불왕 돛 경도(보물 1857호)가 있어, 경상북도 타입 문화재로, 형 367호
조계종 10교구 본사로서 50여 개의 인사를 한다. 은해사 산내암자인 백흥암극악전(보790호), 백흥암 내부 스미단(보486호), 운도암 금동 보살자상(보514호) 등의 보물이 있다. 나가가와에는 영험한 나하기도소로 유명한 거조사 영산전이 있다(아래 영험한 나하기도소 참조) *부산 금정상 범어사 범어사는 합천 해인사, 양산 통도사와 함께 영남의 3대 사원이라 불린다. 신라문무왕 18년(678년)에 의상대사가 화엄십찰의 하나로 창건한 ‘화엄종찰’이다. 국보 삼국유사를 보유한 국내 유일사찰이다(국보인, 삼국유사는 고려 1281년 일련이 편찬한 역사서이지만, 범어사 소장본은 권 4와 5를 1권으로 묶은 것으로 조선 초기 1394년에 간행한 것). 동국여자승람에는 금빛 물고기가 하늘에서 내려 우물에서 놀았다며 산 이름을 김정산으로 하고, 거기에 절을 세워 범어사로 했다는 기록이 있다. ‘범어사’ 건물은 임진왜란 때 모두 다 타버려 10년여를 폐허로 하고 있었지만, 조상 35년(1602년)에 중건했다. 그 후 다시 화재를 받고 광해군 5년(1613년)에 중창했다. 의상대사를 비롯해 원효대사, 경호 선사, 영성선사, 만년 한영은 선사 등 등 많은 고승자 수행처로 명실상부한 한국의 명찰이다. 범어사는 11개의 암자를 잡고 김정불교대학과 범어사 성보박물관을 보유하고 있다. 보물로는 대웅전(보물 434호), 3층 석탑(보물 250호), 조계문(1주문, 보물 1461호)이 있으며, 지방문화재로 당간 지주, 1주문, 석등, 동서 3층 석탑, 동종 등이 있다. 또한 김정공원에서 김정산성을 오를 수 있는 케이블카가 있어 광안대교와 부산시내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부산 김정산 병풍암석불사(일명 병풍사) 1930년 스님 조일현이 창건했다. 김정산의 허리에 있는 거대한 병풍암 바위에 새겨진 29위의 마애석불이 있는 경치 좋은 사원이다(단위 사원에서 가장 많은 마애불상을 보유하고 국내 유일의 최고 마애불군락 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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